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쓰 사건 (문단 편집) == 사건 발생 == [[파일:오쓰 사건.jpg|width=70%]] [[파일:CiIMrjoUkAASeBJ.jpg|width=70%]] [[파일:4848b17de37096a5e91b071d832abad1.jpg|width=70%]] 통과하는 길에서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경찰관 쓰다 산조가 갑자기 [[경찰도]]를 뽑아들고 니콜라이에게 중상을 입혔다. 니콜라이 황태자는 인력거에서 뛰어내려 골목으로 숨었는데 쓰다는 니콜라이를 쫓아가 칼로 베려고 했다. 요르요스 왕자는 대나무 지팡이를 휘둘러 그의 등을 때리고 니콜라이의 인력거를 끌던 [[인력거꾼]] 무카이하타 지사부로(向畑治三郞, 1854~1928)는 쓰다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렸다. 요르요스 왕자의 인력거꾼 기타가이치 이치타로(北賀市市太郞, 1859~1914)는 쓰다가 떨어뜨린 [[경찰도]]를 주워 휘둘러 그의 목에 상처를 입혔다. || [[파일:츠다 산조.jpg|width=70%]] || || 쓰다 산조 || 결국 쓰다는 경비 중이던 다른 순사에게 붙잡혔다. 니콜라이 황태자는 오른쪽 머리에 9cm 정도 상처를 입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. 다케히토 친왕은 현장에 있었지만 구경꾼들이 몰려들어서 가까이 갈 수 없었고 쓰다가 잡힌 뒤에야 현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. 당장 [[제1차 세계 대전]] 발발의 결정적인 원인이 [[사라예보 사건|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 황태자의 암살]]이었듯 외국 황태자가 죽을 뻔한 이 사건은 러시아가 일본에게 선전포고하는 명분으로 삼아도 할 말이 없는 대사건이었다. 다케히토 친왕은 이 사건이 자기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는 중대한 외교 문제라고 파악하여 [[메이지 덴노]]에게 [[전보]]를 보내 [[천황|덴노]]가 직접 교토로 와서 러시아 측에 성의를 보여줄 것을 부탁했다. 메이지 덴노는 이 사건이 중대한 문제라고 판단해 사건 다음날인 [[5월 12일]] 아침에 기차를 타고 저녁에 교토에 도착하였다. 메이지 덴노는 교토에 도착하자마자 니콜라이 황태자를 바로 문병하고자 했으나 니콜라이 황태자 측이 13일에 방문해 달라고 요청하여 일단 [[교토고쇼]]에 묵고 13일 니콜라이 황태자가 머무는 도키와 호텔에서 황태자를 문병했다. 메이지 덴노는 친왕 3명과 함께 니콜라이를 고베까지 배웅했으며 고베 항구에 정박하고 있던 러시아 군함 [[파먀티 아조노바급 장갑순양함]]까지 문병을 갔다.[* 이 때 일본의 중신들은 조선의 [[흥선대원군|대원군]]이 청나라에 납치된 전례를 들면서 덴노가 러시아에 납치되어 버릴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.] 피습 소식을 들은 러시아 제국 정부는 니콜라이 황태자의 일본 일정을 중단할 것을 명령했고 이에 니콜라이 황태자는 일정을 중지하여 도쿄 방문은 하지 않고 함대를 이끌고 5월 20일에 [[블라디보스토크]]로 돌아갔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